홍차의 꿈. 실론티. 난민의 희망. Jenzila Majeed.

 

 

1.   아시아 최장기간으로 기록된 스리랑카 내전.

 

실론티를 기억하는가? 달달한 맛으로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없어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실론티의 실론이 스리랑카의 옛 이름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리고 그 이름이 바뀐 배경에는 슬픈 역사가 숨어있다.

 

우리에게 관광지로 유명한 스리랑카는 내전으로 고통 받고 있다. 주요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다수 민족인 싱할레스에게 차별 대우를 받는 타밀족의 분리 독립운동으로 내전은 시작되었지만, 사실 이들은 1천년 넘도록 함께 거주해온 이웃이었다. 이들이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부터이다. 스리랑카를 점령한 영국은 분열 정책을 펼쳤고, 그들이 물러나자 권력을 둘러싼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 다툼에서 정치인들은 종교적, 민족적 차이를 이용했다. 권력을 잡은 싱할레스는 실론국의 이름을 스리랑카로 바꾸고 공식 언어를 영어에서 싱할리어로 바꾸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싱할레스의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에 반발하여 타밀족 또한 단체를 만들어 정체성을 형성하고 내부적으로 결집했다.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타밀족 내부에선 타밀 호랑이라는 무력 단체가 조직되었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 내전은 유엔 추산 10만명의 사상자와 50만 명의 난민을 낳으며 지속되었다.

 

 아시아 최장기간 내전으로 기록된 스리랑카 내전은 2009 25년의 긴 시간 끝에 타밀 호랑이의 항복으로 끝났다. 그러나 내전의 종료와 함께 분쟁이 어느 정도 해결되는 다른 사례들과 달리 스리랑카에서는 싱할레스, 타밀, 무슬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정부의 전후 재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싱할레스 군인과 가족을 타밀족의 거주지에 주둔하게 했으며, 비옥한 농토들은 외국 자본의 투자처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소수민족들은 강제로 퇴거당해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으며, 50만명이나 되는 난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타밀 호랑이는 무슬림들을 그들의 거주지에서 내몰았고, 7만 오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정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2.   정부도 손 놓은 문제에 뛰어든 Jenzila Majeed

 

 그들을 도운 것은 다름아닌 Jenzila Majeed였다그녀는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풀뿌리 단계에서 타밀과 무슬림의 커뮤니티 형성을 주도했다또한 그녀는 조직한 단체들과 함께 정책적인 차원에서의 캠페인도 펼쳤으며적대적인 정치상황에서 두 세력의 통합을 유도했다

 

가난한 집안의 10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Jenzila Majeed 18년간 재건을 위한 활동을 지속해왔다. 12살 때부터 어려운 가정형편을 도왔던 그녀는 한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되었다그러나 강제 퇴거는 그녀의 계획을 틀어놓았다난민 캠프의 열악한 치료시설 때문에 그녀는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여성 중퇴율을 낮추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세에 그녀는 캠프를 나와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난민 캠프 여성들을 조직했다. 그녀는 난민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식량을 배급하는 정부를 상대로 저항운동을 펼쳤다. 초기 활동 시기의 Jenzila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정부는 무슬림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주입하려 했는데, 이는 조혼, 거주지 이전 제약 등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다른 여성들과 달리 Jenzila는 북부지역 무슬림만의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와 지인들은 Community Development Organization(CDO)를 조직하여 Puttalam 10개의 캠프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새로운 제약들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며 이것은 여성들의 중퇴율을 현저하게 낮추었다.

 

그러나 그녀의 활동에 지지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난민 아이를 차별하는 지역의 학교에 대한 캠페인 등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녀를 지역 커뮤니티의 남자들은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고, 그녀를 추방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편에서 그 결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추방령은 철회되었고 그녀는 오히려 지지 기반을 더 견고히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 Jenzila는 여성 인권활동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각지에 흩어진 무슬림 난민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진행했는데, 푸탈람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CDO 외에 난민 문제만을 전담하는 Community Trust Fund(CTF)를 조직했다. 스리랑카 정부 복지국과 함께하는 이 단체는 CCFENM라는 하부 조직을 두고 있으며, CCFENM은 정치적 차원의 로비를 진행했다. 그들은 스리랑카의 주요 정치인과 타밀 호랑이를 대상으로 난민을 위한 입법, 정책을 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1998년에 무슬림 난민의 존재를 인정하는 서류가 의회를 통과했으며, 푸탈람 지역의 난민 문제에만 집중하는 특별 부서가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치되었다.

 

이런 활동이 지역에 알려지자 CTF는 난민 캠프 여성들을 대상으로 공동 생활, 청년 조직, 인권 교육 등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녀의 활동은 민중들의 관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특별함을 가질 수 있었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무슬림과 타밀 두 그룹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었다. 전쟁 상흔을 간직한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이 지속적인 평화 상태에서 살아야한다는 문제의식으로 CTF평화마을건설을 추진했다. 그들은 집을 70채 지어 전쟁 미망인과 난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을 우선 입주시켰다. 이 정착 프로젝트는 타밀과 무슬림을 혼합했으며, 지역과 정착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그녀의 활동은 2009 30만명의 타밀족이 타밀 호랑이가 관리하는 지역에서 탈출했을 때 빛을 발했다. CTF는 단 24시간 만에 지역 자원을 결집하고, 이들을 새로운 난민캠프로 받아들였다. 스리랑카 정부도 어찌할줄 모르고 손놓고 있던 문제였다. CTF 6만여명의 난민들을 난민캠프 내부에서 몇 달간 보살폈는데, 이 때 무슬림 IDP(난민캠프 주민)들이 타밀 IDP를 돕도록 함으로써 두 그룹의 화해를 촉진했다. 이로 인해 CTF는 스리랑카 군부가 강력하게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공인 받은 NGO가 되었다.

 

그녀는 NGO는 권리와 정의를 다루는 문제들에 대해 지속적인 활동을 벌였다. Jensila는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들의 권리를 강화하겠다는 강한 신념으로 CDO, CTF, CCFENM을 성공적으로 키워 냈고, 실재로 그들의 권리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2010 Jensila The Courage Women Award를 수상했다. “앞으로도 인종, 종교와 관계없이 CTF는 난민 정착을 위해 힘쓸것입니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참고자료

스리랑카 내전

딴지일보...[국제] 스리랑카는 불타고 있는가? -스리랑카 내전, 그 불타는 잔혹함의 일대기 - http://bit.ly/eparva

25피의 스리랑카 내전막내리나 : 아시아·태평양 : 국제 : 뉴스 : 한겨레 http://bit.ly/h9oZvL

 

Jenzila Majeed

아쇼카 재단 2010 아시아 펠로워 http://indonesia.ashoka.org/node/7764

NORTHERN PROVINCIAL COUNCIL http://bit.ly/dI252t

 

Community Trust Fund

공식홈페이지 http://ctfsrilanka.org/

Insight on Conflict » Peacebuilding Organisations » Community Trust Fund (CTF) http://bit.ly/hj3552

 

글쓴이: 김결(브리지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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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mk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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